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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이 시린 걸 놔뒀더니

     콧물이 나온다.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며

     코를 푼다.


                아까 석유를 갖고 온 아저씨

                석유통을 들여놓고

                책상 위 무슨 신문인지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돈도 천천히 받고

                거스름돈도 천천히 주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든다)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들여다보던 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이 인사하고 나갔다.

                (나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든다)


     난로를 피우고

     전기 패드를 켜 등에 대니

     콧물이 자취를 감춘다. 

     서운하다.

     콧물이 그리워진다. 

     콧물과 함께 흐르던 

     무슨 정서

     코를 풀면서 지나가던

     어떤 가난과 쓸쓸함이

     자취도 없다. 

     가난이여, 

     마음의 고향이여.

                                                                             ---- 정현종, 겨울 저녁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읽어 줄 시 한 편을 고르다가 정현종 시인의 시 한 구절에 마음이 젖는다. 겨울날 저녁, 학교 연구실에서 썼을 것 같은 이 시 속에서 화자는 추위와 콧물 흐르는 정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둡고 추운 저녁, 온기라곤 없어 웅크리며 있던 그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등줄기를 느끼며 마주하는 감정은 서운함이다. 콧물 흐르던 순간의 가난, 추위를 다독이며 자신도 다독이던 순간의 쓸쓸함,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던 적막한 슬픔, 이런 것들이 자취를 감춘 순간, 그는 어떤 결핍의 상실을, 간절히 붙들고 있던 마음의 고향이 가난에 잇대어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가난하던 날들이여, 내게로 오라. 나는 기댈 곳도, 스며들 곳도 없이 슬픔에 젖어 영원히 서러웠으나 이제는 그 날의 결핍과 쓸쓸함을 다시금 그리워한다. 결핍은 얼마나 쓰라린 힘이었던가. 우리의 삶이 가난하더라도 꿈은 가난한 법이 없으니 그것이 가난을 노래하는 시의 힘이다. 

    정현종 시인을 만나 뵙고 돌아오던 25년 전 어느 저녁 날의 차가운 공기가 떠오른다. 시인이여, 부디 오래오래 사시라. 건강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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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둠 걷기 Trackback 0 : Comment 0